Before N - 스쿠프 #1
국산 스포츠카의 태동

마이카 시대의 시작, 매니아들의 목소리를 듣다

80년대 말, 한 가정당 한 대의 자동차를 가진다는 마이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매니아들에게 그 당시 우리나라 도로는 스포츠카 하나 보이지 않는 잿빛 도로였을 것입니다.
’89년 4월, 국내 자동차 매니아들의 귀가 쫑긋할 만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뉴엑셀 출시 행사에서 현대자동차는 ‘국산 스포츠카’ 개발 사실을 공개한 것입니다. 스포츠카라면 고출력에 납작한 쿠페, 그리고 무엇보다 외제차라는 공식이 있었습니다.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의 이름과 모델들의 역사를 줄줄이 외우는 자동차 매니아들의 심장이 두근댔을 것입니다. ‘국산 스포츠카가 나온다고?’
그 충격이 흐려지기도 전, 같은 해 10월 도쿄모터쇼에서 현대자동차는 ‘SLC(Sports-looking Car)’ 컨셉을 출품하며 반년 전 선언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스타일 혁명, 국내 최초 2도어 쿠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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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90년 2월, 국내 최초 2도어 쿠페인 스쿠프가 등장했습니다. ‘SLC(Sports Looking Car)’라는 프로젝트명으로 개발된 스쿠프는 총 521억 원의 개발 비용이 투입되었으며, 2세대 엑셀(X2)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스쿠프라는 이름은 스포츠(Sports)의 S와 2도어 자동차를 뜻하는 쿠페(COUPE)의 합성어입니다. 이름이 잘 알려진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S와 Coupe를 따로 읽는 것으로 인지하여 ‘에스 쿠페’ 라고 발음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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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프는 그 전까지 국내에서 이동수단 혹은 부의 상징 정도로 여겨지던 자동차가, 스타일과 개성을 표출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 결과 출시 한 달 만에 계약 대수 5,000대를 돌파하는 등 소비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당시 구매 고객 중 20대가 32.2%, 30대가 50.1%로, 새로운 것에 목말라 했던 젊은 층의 드림카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스쿠프는 단순히 스타일뿐 아니라 ‘최초의 국산 스포츠카’
타이틀을 가져갈만한 성능 요소를 갖췄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파워트레인 발전을 통한 성능 향상

'91. 4 독자개발 알파(α) 엔진
초기형 스쿠프에는 미쓰비시 사의 1.5리터 ‘뉴 오리온’ MPI 엔진이 탑재되었습니다. 최고출력 97마력, 0-100km/h 가속 시간 12.1초, 174km/h의 최고속도는 스포츠카 타이틀을 붙이기엔 다소 아쉬운 성능이었습니다.
하지만 1991년 4월, ‘알파(α)’ 엔진이 탑재된 스쿠프가 출시되면서 부족한 성능에 대한 아쉬움을 날려버리게 됩니다. 알파 엔진은 현대자동차 최초의 독자 개발 엔진으로, 지금의 전 차종 엔진 라인업을 갖추게 되는 시발점이었습니다. 스쿠프에 처음으로 탑재된 알파 엔진은 배기량 1.5리터 자연흡기 방식으로 흡기 2개, 배기 1개의 SOHC 3밸브 형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엔진은 독자 개발 변속기(자동 4단, 수동 5단)와 함께 맞물려 최고출력 102마력, 0-100km/h 가속 시간 11.1초, 최고속도 180km/h의 성능을 구현했습니다.

'91. 10 알파(α) 터보차저 엔진
독자 개발 알파 엔진에 터보차저를 더함으로써 스쿠프 엔진 라인업에 화룡점정을 찍게 됩니다. 국산 최초 가솔린 터보차저 엔진이 적용된 스쿠프 터보는 최고출력 129마력, 최대토크 18.3kg.m의 성능을 구현했습니다. 특히 국산차 최초 0-100km/h 가속 시간 9초대 진입 (9.18초), 최고속도 200km/h 돌파 (205km/h) 등 국산차의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가며, 성능에 목말라 했던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충족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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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미를 더한 페이스리프트
출시 후 2년 4개월 뒤인 1992년 7월,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뉴 스쿠프를 선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매끈한 유선형 디자인에 한층 날카로워진 헤드램프, 후면부에 힘을 실어주는 리어램프, 볼륨감을 더한 범퍼를 통해 세련미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흰색 뉴스쿠프는 현재 남양연구소 R&D 역사관에 전시된 모델로, 90년대 스포츠 쿠페의 스타일리시함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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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저항을 낮춘 날렵한 차체
스쿠프의 공기저항계수는 0.30으로 당시 명성이 높았던 일본 브랜드의 스포츠카와 견주어 대등한 수치를 보였습니다. 이는 공기의 흐름을 고려한 차체 형상과 하부 설계 등이 빛을 발한 결과입니다.
※ 공기저항계수란?
공기저항계수는 자동차의 진행을 방해하는 전후 방향의 힘을 수치화한 것입니다. 이 수치가 낮을수록 저항 감소로 인한 가속 성능 향상, 풍절음 감소를 통한 실내 정숙성 확보, 공력 성능을 기반으로 한 연비 향상 등의 이점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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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디자인의 완성, 플로팅 루프
스쿠프의 옆과 뒤 창문은 마치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보여집니다. C필러를 검게 처리하여 마치 지붕이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플로팅 루프’ 디자인을 구현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봐도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스타일을 자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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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력과 스타일 모두 고려한 리어 스포일러
트렁크 위에 당당히 자리 잡은 리어 스포일러는 외관의 스포티함을 더할 뿐 아니라, 후방 다운포스를 향상시켜 우수한 공력 성능까지 구현했습니다. 날카로운 스포일러 형상은 스포츠카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 디자인 요소입니다.
※ 다운포스란?
다운포스란 공기 역학적으로 차를 노면쪽으로 하향시키는 힘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운포스가 증가하면 접지력이 증대되어 고속 주행 시 차량의 안정감을 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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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함을 강조한 내장 디자인
크러쉬패드 상단은 매끄러운 라인을 그리며 스포티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티어링 휠의 그립감을 높이기 위해 림 안쪽에 살며시 홈을 파놓은 배려나 부스터 게이지를 통해 터보차저의 작동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은 스쿠프의 스포츠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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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버킷 시트
스쿠프는 국내 최초로 스포츠 버킷 시트가 적용된 차량입니다. 두툼한 백 볼스터가 적용되었고, 하체를 지지할 수 있도록 좌우로 솟은 쿠션 볼스터는 운전자의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합니다.
“ 1번 코너를 진입할 때 전면, 후면, 측면 어느 시야에서든 눈에 보인 것은
스쿠프 뿐이었다. 모터스포츠의 판세는 이미 스쿠프로 바뀌어버렸다. ”
- 김한봉, 펠롭스 레이싱팀 단장 -
스쿠프, 그리고 대한민국 모터스포츠의 세대교체

국내 모터스포츠의 시작은 험로를 달리는 오프로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동차와 인간 모두의 한계에 도전하는 레이스로 알려진 다카르 랠리처럼 오프로드 레이싱에서는 숨 막히는 경쟁구도가 펼쳐졌습니다. 이후 국내 모터스포츠의 영역은 점차 넓어져 본격적인 온로드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온로드 레이스에서는 배기량 기준의 클래스 구분에 따라 다양한 차종이 참가하였고, 본격적인 속도 경쟁이 펼쳐져 보다 빠르고 민첩한 자동차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습니다.

경량화 기반의 민첩한 움직임, 강력한 터보 엔진으로 무장한 스쿠프는 타 차량에 비해 서킷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출력에 목마른 선수들의 갈증을 해소시키며 온로드, 오프로드 경기 구분 없이 최상의 자리를 석권하여 많은 레이서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원메이크레이스(단일차종경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20대 중 18대가 스쿠프로 국내 모터스포츠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양상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레이서들에게는 "우승을 바란다면 스쿠프를 타라"는 말이 오갈 정도로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습니다.
파이크스 피크에서의 우승으로 이어지다
Pikes Peak International Hill Climb
파이크스 피크 힐 클라임(Pikes Peak International Hill Climb)은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열리는 독특한 산악 도로 경기로 해발 2,862m에서 4,301m까지 19.87km의 산길을 달리는 경기입니다. 노면 포장 상태가 좋지 않고, 산악 지형 특성상 코스 바깥이 낭떠러지여서 차량과 운전자 모두 한계에 도전해야 하는 레이스입니다.
“스쿠프 터보는 급커브 시 뛰어난 안정성과 강력한 엔진 파워,
우수한 브레이크 성능이 잘 조화되어 승리할 수 있었다”
- 로드 밀렌 (Rod Millen), 1992년 파이크스 피크 힐 클라임 우승 소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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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모터스포츠를 휩쓴 스쿠프의 활약은 해외 무대에서의 성과로 이어집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로드 밀렌(Rod Millen)은 스쿠프 터보 랠리카로 1992년 파이크스 피크 힐 클라임 2WD 양산차 클래스에 참가하여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로드 밀렌은 “스쿠프 터보는 급커브 시 뛰어난 안정성과 강력한 엔진 파워, 우수한 브레이크 성능이 잘 조화되어 승리할 수 있었다”고 우승 소감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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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로드 밀렌은 제네시스 쿠페로 같은 대회에서 2012년 우승을 거머쥐었던 리즈 밀렌(Rhys Millen)의 아버지이기도 하니, 두 부자는 현대자동차 스포츠카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스쿠프가 해외 모터스포츠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한 것은, 현대자동차 스포츠 모델 역사의 시작으로써 매우 큰 의미가 있겠습니다. 당시 우승했던 스쿠프 터보 랠리카는 현재 울산공장 홍보관에 전시되어 자리를 빛내고 있습니다.
2편에서는 스쿠프 오너 이야기와 2016년 다시 쓰는 스쿠프 시승기를 통해 그 발자취를 이어갑니다.
Before N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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