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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Heritage #2

포니의 탄생

대두되는 고유모델의 필요성

  • 70년대 초 국내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던 신진자동차는 한국이나 대만과 제휴를 맺은 기업의 중국진출을 불허한다는 중국정부의 방침 발표 이후 도요타가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하루아침에 제휴선을 잃게 되었습니다. 경쟁사의 일이었지만 현대자동차도 해외제휴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넘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실제로 현대자동차의 창립과 함께 제휴를 맺은 포드는 자본합자로 새로운 자동차회사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먼저 해놓고도 도요타가 신진과 결별하는 것을 보고는 협상을 늦추었습니다. 신진자동차는 새로운 파트너인 GM과의 협상이 의외로 쉽게 체결되어 50:50 합자로 1972년 GMK를 설립했고 곧바로 시보레 1700과 레코드를 출시했습니다.

그런 반면 현대와 포드의 합자회사 설립에 대한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포드의 오만함으로 인해 결국 자본제휴가 무산되기에 이르렀고 현대자동차는 고유모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한정된 내수시장을 넘어 수출까지 가능한 고유의 모델을 만들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 당시 경영진의 결단이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이끈 경험을 가진 정주영 명예회장은 ‘한 나라의 국토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도로는 인체 내의 혈관이고 자동차는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으며 그 혈관을 우리 손으로 뚫었으니 이제는 좋은 피를 공급할 때’ 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자본금 17억원에 불과한데다 조립생산 경험밖에 없는 회사가 합작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투자와 개발을 감행하는 모험이 실패할 경우 발생할 존립의 불안정성 때문에 반대의견도 많았습니다. 당시 현대가 조립생산한 뉴 코티나는 GMK의 시보레 1700을 압도하며 내수시장을 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편한 수익을 얻으면서 해외 자본과 기술에 종속되는 것보다는 먼 미래를 위해 고유모델 개발을 시작으로 독자기술을 쌓아나간다는 도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포니 개발을 위해 결성된 다국적 프로젝트 팀

  • 때마침 한국의 산업구조를 경공업 위주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중화학공업 정책이 1973년 1월에 발표되었고 곧 이어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의 골자는 한국 실정에 적합한 경제적인 한국형 승용차의 개발 및 생산을 중점 지원해 중공업화의 전략산업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미래를 위한 고유모델 개발이라는 경영방침과 국민차 개발이라는 국가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의 산업수준과 인프라 구축상태는 국제기준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직원들도 자동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되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자체기술이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기술을 공여해줄 선진업체와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다양한 자동차회사와 개발과 양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접촉한 뒤 일본의 미쓰비시와 양해각서가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휴관계를 바탕으로 미쓰비시 랜서(Lancer)의 섀시와 파워트레인을 이용한 고유모델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플랫폼이 결정된 뒤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의뢰했습니다.

  • 포니의 플랫폼과 디자인은 결정되었지만 개발과정의 진행은 또 다른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주어진 부품으로 생산라인에서 포드 차들을 조립 생산한 경험은 있었지만, 도면과 플랫폼만 가지고 차를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단계였습니다. 많은 논란과 시행착오를 거친 뒤 영국 BLMC 출신인 조지 턴불(George Turnbull)을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하고 그의 휘하에서 소형차를 개발했던 엔지니어들을 데려와 본격적인 개발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포니 개발은 일본 미쓰비시의 플랫폼, 이탈리아 주지아로의 설계와 디자인, 영국의 생산기술 자문이라는 다국적 프로젝트로 진행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 기술진은 이 모든 과정을 종합하고 취사선택하면서 고유모델의 개발과 양산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주역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토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도로는 인체 내의 혈관이고 자동차는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으며 그 혈관을 우리 손으로 뚫었으니 이제는 좋은 피를 공급할 때" - 고 정주영 명예회장 -

포니의 탄생, 그리고 시작된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시장 진출

이렇게 개발된 포니는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되었고, 1975년 12월 생산에 들어가 76년 2월 울산공장에서 첫 출고되었습니다. 당시 포니 기본형의 가격은 2,273,270원 이었습니다.

참고로 그 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의 에버랜드가 용인자연농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했고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가 개봉했습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825달러였고, 짜장면 가격은 그 전해 폭등하여 150원 정도였으며, 우리나라의 자동차 등록대수는 지금의 100분의 1 정도인 22만대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 포니는 뛰어난 성능과 디자인으로 경쟁차종인 기아 브리사와 새한 제미니를 압도하며 당시 승용차 시장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수출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포니 추후 1,439cc 92마력 엔진이 추가되고, 현대자동차 소형설계부가 직접 설계한 픽업, 왜건 그리고 3도어 모델도 출시되었으며 자동변속기 사양도 더해졌습니다.

  • 82년에는 마이너체인지된 포니2 가 발매되었습니다. 포니2는 국산차 최초로 북미지역인 캐나다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여 현대차의 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 포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로서 한국 자동차 산업이 기술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의 임직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국산차의 수출시장도 개척한 차입니다. 현대자동차가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출발점에 있는 차가 바로 포니입니다.

  • 포니가 첫 출고된 울산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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