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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lliant 30: 작가 유승호

전통적인 동양화를 <문자 산수>로 재해석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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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 동양 시•서•화의 전통에서 받은 영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다

<뇌출혈> 유승호_종이에 피그먼트, 은박_116.9x92cm_2013

언어와 문자 사이의 관계, 더 나아가 언어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들을 변형시키고 해체시키는 작업을 해온 작가 유승호. 그의 작업은 ‘문자 산수’라는 일련의 작품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대변합니다. ‘문자 산수’를 통해 그는 그림을 ‘쓰고’, 글을 ‘그립니다’. 그의 그림들은 동양의 산수화들을 차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형상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선묘가 아닌, 빼곡하게 메워져 있는 자잘한 글씨입니다. 멀리서 보면 특정한 도상들이 나타나지만, 그 형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실체를 인지할 정도로 가까워지면 이미지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대신 글자만 떠오릅니다. 이미지가 텍스트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언어, 혹은 글자들은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산봉우리를 표현하기 위해 로켓이 발사되는 소리 ‘슈’를 영어 ‘shoo’로 바꿔 가득 채우기도 하고, ‘야호’ 한 단어로 전체의 형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거대한 이미지가 실제로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작은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으나, 알 수 없는 기호처럼 쓰여있는 글자들의 의미로부터 소외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 유승호는 이런 방식으로 언어나 이미지가 재현하는 유사를 붕괴시키며, 전통적 의미들을 함께 해체시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쓰고’, 글자를 ‘그립니다’.

작가와의 대담

유승호 작가

Q. 서양화과 출신이지만 그동안의 작업은 주로 전통 산수화의 모티프를 사용해왔습니다. 고전 모티프를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처음부터 한국성이라든가 전통과 같은 것에 대한 진지한 의식이나 고민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관계성이란 측면에 주목하면서 내적인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작업의 모티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Q. 관계성에 대해 설명해주신다면요?

언어나 사회적으로 직접 드러나지 않는 우연적 관계를 말합니다. 관계없는 것들 사이에 가능할 수 있는 관계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제가 살고 있는 ‘지금’은 시간의 차이에서 벌어진 예전의 것들과 별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인 부분에서는 명확하지 않을지라도 무엇인가 계속 연관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자라오면서 경험한 것들은 현대의 도시적 삶이나 문화와는 사실 거리가 멉니다.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던 어머니를 도왔던 경험들은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들이었고, 그 안에서 느꼈던 기운 같은 것들이 제 작업의 모티프가 됩니다. - 유승호 -

<낭만에 대하여> 유승호_종이에 잉크_160x66.7cm_2012-2013

Q. 그것이 고구려 벽화에 대한 애호와도 관련이 있을까요?

어느 부분에서는 그렇습니다. 정서적 에너지나 기운이 통하고 있음을 느끼고, 비록 그 느낌이 미약할지라도 문득문득 감지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자라오면서 경험한 것들은 현대의 도시적 삶이나 문화와는 사실 거리가 멉니다.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던 어머니를 도왔던 경험들은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들이었고, 그 안에서 느꼈던 어느 기운 같은 것들이 내 작업의 모티프가 됩니다. 그렇다고 동양화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이 점이 현재의 시점에서 중요한 고민이 됩니다. 사적인 경험이나 개인적인 느낌들을 작업으로 옮길 때 어떤 이론들을 통해서 뒷받침해야할지, 아니면 그동안 하던 대로 나에게 친밀한 것들로부터 ‘멍때림’의 순간에 감지되는 느낌을 중시해야 할지... 나에겐 정서적 에너지, 즉 어떤 기운이 중요하고, 내가 선택해온 전통적 도상들 역시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내 작업은 그 안에 나의 에너지를 동화시키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 유승호 작가

    Q. 유승호 작가는 그림을 ‘쓰고’ 글씨를 ‘그립니다’. 이러한 모순적인 행위, 혹은 전통적 장르의 규정이나 개념과는 다른 작업은 아마도 서구의 근대적 예술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온 ‘시•서•화’라는 문인화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됩니다.

    지금까지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해주길 바랬지만 구체적으로 언급이 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는 이론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제 자신이 그런 방식으로 발언하는 것이 익숙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제 작업을 형식적으로 보자면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자 산수, 시, 형상적 언어입니다.

  • 유승호 작가 인터뷰 이미지

    Q. 그렇다면 시나 그림의 작업에서 주로 영감을 얻는 것은 일상이라고 넓게 얘기해도 될까요?

    그렇습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현상들로부터 받는 인상이 새로운 생각이 됩니다.

유승호 작가 인터뷰 이미지

Q. 언젠가 지인이 유승호 작가의 시(詩)에서 ‘술 냄새가 난다’고 했다던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작업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막걸리 2/3 정도를 마시고 나면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병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시를 끝냅니다. 이러한 시들은 취중에 우발적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평소에 멍 때리면서 문득 생각나는 단어나 이미지들을 메모해두었다가 시를 쓰고 있습니다. 저의 ‘멍’ 때리기에서 ‘멍’은 멍멍 짖는 강아지이기도 하고, 멍든 멍이기도 하고, 멍 때리는 멍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의미를 분절시키고 해체시키고 무의미화 시키는 것이 대체로 제 작업들의 본질이며, 시 작업 역시 이에 포합됩니다.

Q. 일상과 예술에 대해 지니고 있는 철학은 무엇인가요?

저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이론을 내세워서 작업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유치한 표현을 좋아하기에 ‘유 치한’으로 서명을 쓰거나 유치하게 웃으면서, 치한처럼 굴면서 무언가 희롱하는 작업이 결국 본래의 의미를 분절 또는 해체시키고 무의미화 시키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작업은 일상과의 일종의 놀이이며, 이 놀이는 유 치한입니다.

유승호 작가 인터뷰 이미지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제 작업에서 에너지의 원천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내적인 것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 에너지로부터 소재를 얻고 있으며, 그래서 저는 계속 뇌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말랑말랑하게’ 주무르며 무엇인가 끊임없이 해나가고자 합니다. 그 과정은 때로는 외롭고 힘들고 지루하기도 하겠지만, 제 작품들을 보면서 ‘대단하다’와 ‘재밌다’는 상반된 느낌을 관객들이 동시에 표출하는게 가능한 작업들을 통해 눈앞의 달콤함을 계속 경계하는 작가가 되고자 합니다.

  • 낭만에 대하여

    유승호_종이에 잉크_160x66.7cm_2012-2013

    낭만에 대하여
  •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유승호_종이에 잉크_160.2x122cm_2009-2012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 거짓말이야

    유승호_종이에 잉크_160x150cm_2012-2013

    거짓말이야
  • 뇌출혈

    유승호_종이에 피그먼트, 은박_116.9x92cm_2013

    뇌출혈

Profile

유승호 작가

한성대 회화과를 졸업한 작가 유승호는, ‘문자 산수’라는 형식을 통해 언어나 문자의 의미, 언어와 이미지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제5회 공산미술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제22회 석남미술상을 수상했다. 1999년부터 2013년까지 8회의 개인전과 70여회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쌈지스페이스, 가나아트센터,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두산 뉴욕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거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쌈지컬렉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등과 더불어, 해외에서 미국의 휴스턴미술관, 일본의 모리미술관, 영국의 퀸즐랜드 아트 갤러리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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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자기_가변크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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