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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lliant Ideas Episode #25: 안규철

기억을 호출하고 환기하는 공작꾼

<무지개를 그리는 법> 2013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전경

간접화법으로 본질을 말하다

<무지개를 그리는 법> 2013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전경

안규철(Ahn Kyuchul)은 스스로를 “완성되지 않은 작가”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개념을 생성하며 뜻밖의 이슈를 던지는 그에게, 작품이란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미술관 바닥에 커다란 미로 어항을 만들어 금붕어를 풀어놓거나 일정 기간 매일 피아노 연주가 끝나면 건반을 하나씩 없애버리며 우리에게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안규철.

개념을 이미지로 환기시키는 능력으로 사소한 일상에서 사건을 이끌어내는 안규철을 블룸버그와 현대자동차가 마련한 Brilliant Ideas Episode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1,000명의 책과 기억의 벽

<일곱 개의 수평면> 2013 유리컵, 물, 나무 15×60×5cm

1980년대, 현실 비판 의식을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 대입하던 안규철은 일찌감치 주목받았습니다. 작품의 완성도도 높았을 뿐 아니라 그가 세운 개념들이 예술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작업하는 그의 자세도 늘 화젯거리였습니다. 그의 초기작업이 사회적 사건의 풍자처럼 설명적 재현 방식이었다면, 근래 작업은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 마련된 개인전에 선보인 작품들이 안규철의 변화된 경향을 드러내는데,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으면서 관람객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예전 작품과 사뭇 다릅니다. 재현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것에 작가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쓰는 글>(세부 이미지) 2013 모래, 스테인레스 스틸 30×300cm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을 끈 <1,000명의 책>은 제목 그대로 천명의 사람이 정해진 시간, 고정된 자리에서 필사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책의 특정한 부분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참가자들 모두는 작가가 되고 텍스트는 이미지가 되며 글을 쓰는 모습과 사운드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이는 글쓰기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인문적 사유의 가치를 환기시키고, 파편화된 개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대가 존재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또 다른 <기억의 벽>은 전시 초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메모지로 가득했던 벽이 관람객들이 적은 메모지로 채워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전시장 벽에는 8,600개의 메모지가 빼곡하게 걸렸는데, 각 메모지에는 ‘잃어버린 것’, ‘그리워하는 것’, ‘부재하는 것’이 적혔습니다. 그리고 이 메모들은 다른 메모들로 뒤덮이며 전시 기간 동안 마치 카드섹션처럼 벽면은 계속 변했습니다.

드로잉

미술, 문학, 건축, 음악, 영상, 퍼포먼스, 출판을 포괄하는 융복합 작품을 완성하는 안규철. 여러 장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동시대 미술은 배타적이고 내재적인 자기 논리에 의해 전개되는 장르가 더 이상 아닙니다. 다른 것들을 향해 열려 있고 외부의 자극과 영향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들과의 만남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타 장르와 매체를 끌어들이고 기존의 형식을 해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다양성을 조율하여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사랑> 2012 LED 조명장치, 타이머, 삼각대 가변크기

전시를 통해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말을 걸고자 했던 작가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대규모 전시이기 때문에 보편적 주제를 고민하던 작가는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는 세상, 사랑이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되고 또 기만과 폭력의 이유가 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아직 그리워할 다른 사랑의 가능성,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가 있는지 묻고 싶은” 이유로 ‘사랑’이란 키워드를 고른 것입니다. “사랑은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지만, 너무 외로운 말입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가치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 그 궁극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것에 관심 있다”는 작가는 일상의 사물을 통해 다른 방식의 소통을 시도합니다.

드로잉

전시는 철학과 사색에 대한 부담을 갖는 미술인들에 비해, 대중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참여했는데, 이에 대해 “미술관의 관람객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그냥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들은 과정에 참여하고 싶어 하고, 스스로가 여기서 만들어지고 있는 가치의 일부가 되고자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무거운 것은 가볍게, 꽉 채워진 것은 비어 있게 하는 데 관심이 있는 작가 안규철. 작가란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하는 사람’이라 주장하는 그의 미래에 세계 현대미술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습니다. ■ with ARTINPOST

  • <둘의 엇갈린 운명> 2013

    브론즈 주조, 아크릴 채색, 선인장 화분 가변크기

    <둘의 엇갈린 운명> 2013 브론즈 주조, 아크릴 채색, 선인장 화분 가변크기
  • <모래 위에 쓰는 글>(세부 이미지) 2013

    모래, 스테인레스 스틸 30×300cm

    <모래 위에 쓰는 글>(세부 이미지) 2013 모래, 스테인레스 스틸 30×300cm
  • <사랑> 2012

    LED 조명장치, 타이머, 삼각대 가변크기

    <사랑> 2012 LED 조명장치, 타이머, 삼각대 가변크기
  • <일곱 개의 수평면> 2013

    유리컵, 물, 나무 15×60×5cm

    <일곱 개의 수평면> 2013 유리컵, 물, 나무 15×60×5cm
  • <무지개를 그리는 법> 2013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전경

    <무지개를 그리는 법> 2013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전경
  • <무지개를 그리는 법> 2013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전경

    <무지개를 그리는 법> 2013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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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안규철

유학 시절 안규철(Ahn Kyuchul)은 누군가 한 입 베어 먹은 초콜릿을 그리고, 칸칸이 글자를 새겼습니다. ‘M O R G E N. 모르겐’, 독일어로 내일이라는 뜻인 낱말은 물론 작가가 붙인 것인데, 이유는 명백합니다. 내일은 언제나 초콜릿처럼 달콤하니까. 손꼽히는 개념미술가 안규철의 20년 전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림은 그의 이론과 실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탄탄한 이력과 철저한 자기 철학을 지닌 작가는 감정을 풍요롭게 변모시키는 마술사입니다.
작가 안규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대학 졸업 후 7년 동안 한국 주요언론기관에서 미술기자로 일했습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Stuttgart State Academy of Art and Design, Germany)에서 수학했고, 재학 중이던 1992년에 스페이스샘터화랑에서 첫 개인전 <안규철 1990-1992>을 열면서 미술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로댕갤러리에서 <49개의 방>(2004), 공간화랑에서 <2.6평방미터의 집>(2009) 등 열 차례의 개인전을 선보였습니다. 또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일상적 사물과 공간 속에 내재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을 발표해온 그는 서구 현대미술의 체험을 기록한 『그 남자의 가방』, 테이블에 관한 드로잉과 생각을 묶은 『43 tables』를 썼고, 현대문학에서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을 펴냈습니다.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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