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Technology #7: 증강현실
디지털 기술이 예술에 가져온 혁명


마치 현실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르네상스 프레스코 벽화의 비밀이 원근법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근법 연구가 위베르 다미쉬는 어떤 회화도 단지 선형 원근법에 의해서만 실재와 똑같은 환영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명확한 실루엣과 날카로운 선의 구성만으로 화면을 구성할 경우 오히려 인조 꽃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는데, 조화는 얼핏 눈속임을 가능하게 하지만 결코 실재 꽃이 지닌 생동감을 주지 못할뿐더러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는 이치이지요. 따라서 원근법 회화에는 강한 선이나 기하학적 구성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다미쉬는 이러한 요소를 다소 은유적인 표현인 ‘구름’(nuage)으로 명명합니다.
하지만 ‘구름’이라는 표현은 꼭 은유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다미쉬가 주목하는 화가 코레지오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선 원근법에 절대적으로 충실했던 르네상스 화가 코레지오는 교회내부의 둥근 천장에 그린 벽화에 항상 구름을 그려놓았습니다. 구름은 하늘을 가리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원근법으로 잘 구성된 화면이 마치 심연의 공간처럼 깊은 느낌을 줍니다. 사람들은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현실과 똑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제로 보았지만, 그것은 절대로 필요충분의 조건이 아닙니다. 정반대의 요소인 흐릿하고 모호하며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듯한 공간의 이미지, 즉 구름의 요소가 필요한 것이지요.
가상현실에서 증강현실로

다미쉬가 가르쳐준 교훈은 이것입니다. 현실과 똑같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눈속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하던 시기인 고전 할리우드 영화 또한 스크린에서 전개되는 모든 것이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관객은 마치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도록 말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일부 이론가들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르네상스 환영주의와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는데요, 그러나 알고 보면 여기에도 어떤 함정이 숨어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실재와 같은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은 실재와 똑같은 가상만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도록 관객들을 유도하는 모호한 장치들 때문입니다. 1인칭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 바탕을 둔 교묘한 내러티브 구조와 페이드아웃, 클로즈 업, 이중인화와 같은 모호한 비현실적 장치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장치들은 다미쉬가 말하는 ‘구름’과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화의 가상적 이미지가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이 느껴지는 것도 결국은 눈속임에 의한 것입니다. 19세기, 아니 심지어 지금까지도 예술은 이러한 눈속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일화인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에 관한 이야기나, 진짜 소나무로 착각하고 새가 달려들어서 부딪쳤다는 우리나라 신라시대 솔거에 관한 이야기부터 3D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이미지를 추구하는 경향이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한 마디로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것, 즉 가상현실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의 눈을 속인 제욱시스의 포도넝쿨 그림이나 제욱시스의 눈을 속인 파라시오스의 커튼 그림은 모두 진짜 같은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 가상현실의 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을 통해 이러한 가상현실의 꿈은 드디어 실현되는 듯 합니다.
이러한 가상현실의 꿈은 19세기까지 서구의 사상을 지배해 온 플라톤주의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플라톤은 이 세상을 하나의 환영으로 보았는데, 현실은 이데아라는 초월적인 어떤 것의 복제물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했지요. 그리고 예술은 그러한 복제된 현실을 또 다시 복제하는 것이므로 예술의 사명은 이데아와 닮은 현실을 똑같이 모사함으로서 가능한 이데아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예술은 진짜처럼 보이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란 주장인데, 이 주장에 근거하자면 지금까지 미술을 지배한 가상현실의 패러다임은 예술로 번역된 플라톤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매체이론가 볼터와 그루신은 자신들의 주저인 「재매개」에서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을 구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변화의 다양한 양상들로 여길 뿐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볼터와 그루신은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차이를 명확하게 언급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가상현실이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화하는 것이라면, 증강현실은 현실을 가상화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은 서로 반대방향의 운동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하지만 볼터와 그루신은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구분을 여기서 멈춥니다. 볼터와 그루신의 구분은 그들이 생각한 것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닙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은 디지털 기술의 일종일 뿐입니다. 가상현실이란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인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증강현실이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현실을 증강시키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현실이지만 디지털 기계를 통해서 현실이 더욱 증강되어 나타나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현실이 보이는 것입니다. 증강현실이란 바로 이렇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현실의 정보를 증강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은 단지 두 가지의 디지털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디지털 기술이 제시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상반된 패러다임을 내포합니다.
미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다

이러한 상반된 의미는 20세기 이후의 미술과 관련 지어 생각할 경우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0세기 미술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그것은 이미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현대회화의 흐름을 ‘평면성’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개념으로 정의하려다가 실패한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경향은 읽어낼 수는 있는데요, 그것은 미술의 기능을 어떤 가상적 이미지의 창출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현실 자체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 자체를 보여주는 것과 현실과 닮은 가상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가령 입체파의 효시로 알려진(이 의견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이 그림은 현실과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는 가상적 이미지가 될 수 없죠. 하지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그림을 통해서 피카소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현실 자체였습니다. 이 그림을 잘 보면 어떤 시각적 통일성도 결여돼 있습니다. 그림에서 시각적 통일성을 발견하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무모한 시도입니다. 더군다나 아프리카 목각인형에서 힌트를 얻은 여인의 얼굴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기존의 회화가 화면을 인위적으로 구성하여 시각적 통일성을 획득한 것이 허구임을 폭로합니다. 그것은 가상의 이미지(그림)를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허구적 기제일 뿐입니다. 현실은 초점도 없으며 어떤 시각적 통일성도 결여하는데, 바로 그런 점에서 피카소의 그림은 시각적 통일성을 방해하며 파편화된 현실 자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만 더 들어 볼까요. 추상 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록은 액션 페인팅과 드리핑 기법으로 유명합니다. 캔버스를 펼쳐놓고 물감을 뿌리는 드리핑 기법은 결코 가상적인 이미지가 아닙니다. 어떠한 현실도 재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그림은 현실 자체를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모든 그림은 직립한 인간의 눈에 보이는 수직적인 구조를 지닌 현실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수직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사물은 중력의 저항에 맞서서 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직적 시각은 단지 직립한 인간의 시각일 뿐,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은 아닌 것이죠. 폴록의 그림은 어떠한 중력에도 저항하지 않고 물감의 흘러내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수평적 시각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수평적 이미지는 기존의 시각에서 보자면 현실성을 결여한 이미지이지만 그 자체가 중력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충실하게 드러낸 이미지인 셈입니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폴록의 그림은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과 닮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가상 이미지가 아닌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은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드는 가상현실의 패러다임, 즉 플라톤주의를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플라톤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곧 비현실적인 공상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카소나 폴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우리의 협소한 시각에 제약되지 않은 현실의 또 다른 모습, 즉 현실 자체인 셈이니까요. 지금껏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 이것은 곧 현실을 증강시키는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과 증강현실 기술과 관련해 항상 제기된 문제 중 하나는 가상현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현실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가짜의 현실이 만들어져서 인간을 기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적지 않은 영화나 소설이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의식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꾸로 보면 사람들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현실과 똑같은 가상을 창조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디지털 기술은 이러한 욕망의 성취를 실현가능한 것처럼 만듭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이야말로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며, 20세기 이후 미술가들의 노력을 되돌리는 왜곡된 망상인지 모릅니다. 디지털 기술을 가지고 현실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가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제욱시스나 파라시오스의 케케묵은 신화, 혹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환영주의, 허리우드 고전 영화의 이데올로기를 계승하는 것인지 모르니까요. 디지털 기술이 설혹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가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눈속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실과 똑같은 이미지 이외에 그렇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눈속임의 장치, 즉 구름이 필요한데 ‘디지털 기술이 현실과 똑같은 가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가상현실의 패러다임은 디지털 기술의 전망을 오히려 어둡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 혹은 매체를 증강현실의 패러다임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디지털 기술은 지금까지 우리가 현실을 보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데, 보는 방식의 전환은 현실에 대한 왜곡이 아닌 증강을 의미합니다. 디지털 기술은 피카소나 폴록이 제시한 시각 이상의 급진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현실은 무한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현실을 모방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20세기의 미술가들은 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현실을 결코 모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의 협소한 시각을 벗어나서 또 다른 현실을 드러내고자 노력했을 뿐이죠. 즉 현실을 증강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측면은 바로 이렇게 현실을 증강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돼야 할 것입니다. ■ with ARTIN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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